하박국 1:1-4 하박국은 하나님 말씀이 무시되고 하나님의 공의가 전혀 행해지지 않는 유다의 상황을 보고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고 있지만 아무런 응답도 받지 못했다.
하박국은 요시야 말기(640-609 B.C.)에서 여호야김 재위 초기(608-598 B.C.)에 유다에서 살았던 선지자이다. Baker는 하박국이 레위지파에 속한 예수의 아들로서 성전에서 찬양으로 섬기던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Baker, 42). 하박국이 살았던 때는 역사적으로는 니느웨가 멸망하고 바벨론이 등장하던 때였다. VanGemeren은 하박국이 요시야의 개혁이 끝나고 유다가 독립성을 상실해가는 것을 목격했다고 했다(VanGemeren, 290). 이러한 혼돈의 시기에 하박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앗시리아가 멸망하면 이스라엘이 다시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게 될 줄 알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 다른 더러운 이방세력인 잔악한 바벨론이 유다를 괴롭히게 놔 두시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하박국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공의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2:13절에서 하나님은 이러한 질문에 대해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라고 대답하셨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바벨론보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유다의 악이 더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악한 바벨론을 사용하여 유다를 정결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오직 하나님만 믿는 정결한 자들만 살려 놓으시고 나머지는 다 멸하셔서 그 백성들을 정결한 공동체로 세우시려는 것이었다.
1:1절은 하박국이 묵시로 받은 말씀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원어의 순서대로 직역하여 놓는다면 "짐, 그것은 하박국이 본 것, 선지자" 이라는 뜻이다. 여호와께서는 하박국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런데 그 말씀은 짐이라고 되어 있다. 그 짐은 여호와께 받았으니 반드시 전달해 주어야 하는 짐이다. 더구나 그 짐은 보았다고 했기에 하나님께서 하박국에게 환상으로 보여주신 짐이다. 반드시 받을 사람들에게 내려 놓아야 할 짐이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공식적인 대변인이다. 따라서 하박국은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공식적인 택배 배달꾼이다. 하나님께 받은 짐을 받는 사람들에게 전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2절은 짝을 이루는 댓구이다. 2절 앞부분은 "여호와여! 언제까지 내가 도와달라고 부르짖어야 합니까? 언제까지 들어주시지 않으시렵니까?" 라는 뜻이다. 하박국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었을까? 무엇을 부르짖었는데 하나님은 전혀 응답을 해 주시기 않으시는 것일까?
답은 이와 짝을 이루는 2절 뒷부분에 나와있다. "내가 주님께 '폭력입니다!' 하고 부르짖어도" 라는 말은 2절 앞부분에서 호세아가 계속 부르짖은 내용의 핵심이다. 폭력이란 강제로 억누르고 때린 뒤 빼앗는 것이다. 이는 공의의 반대이다. 하나님의 공의가 그 땅에 가득해야 하는데 반대로 폭력을 휘두르는 강도들만이 가득하다는 뜻이다. 약한 자들이 힘이 있는 강도들에게 맞고 빼앗기고 있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 구해 달라고 간절히 외쳤는데도 하나님은 구해 주시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하박국이 폭력이라고 외친 것은 무엇을 가리킬까? Barker와 Fausset은 여호야김의 통치라고 말한다(Barker, 297; Fausset, 624). 유다 왕 요시야는 우상들을 부수고 종교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요시야가 죽고 악한 왕인 여호야김의 통치가 시작되자 다시 폭력적인 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예레미야 36:20-26절에 보면 여후디가 하나님의 말씀이 적힌 두루마리를 낭독하면 여호야김은 그것을 잘라 불에 태웠고 선지자 바룩과 예레미야를 잡으라 한 것이 나온다. 의인들이 핍박을 당하고 악인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 된 것이다.
3절 앞부분은 어찌하여 "나로 불의를 보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악을 그대로 보기만 하십니까?" 하박국은 불의가 계속 판을 치는 모습을 계속해서 보고 있는데도 하나님께서는 계속 그대로 방관만 하고 계신다는 뜻이다. 약탈과 폭력이 하박국 앞에서 벌어지고 다툼과 시비가 그칠 날이 없다는 것이다.
약탈이란 건물이나 가구 같은 것을 부수어 폐허로 만드는 것이다. 폭력이란 사람을 때려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따라서 집이나 살림살이나 사람 할 것없이 다 때려 부수고 폭력을 휘둘러 다치게 한다는 것이다. 다툼이란 개역개정에서 "변론" 이라고 번역했다. 이는 법정에서 고소하고 변론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시비란 말로 싸우는 것이다. 이는 약탈과 폭력으로 인해 법정 소송이 벌어지고 서로 말로 다투는 장면이다.
4절은 그 결과 율법이 해이하다고 했다. 율법이란 모세오경을 뜻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죄라고 한 것들이 완전히 무시되고 있는 상황이다. 또 정의가 전혀 시행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정의란 공정한 재판을 내린 판례들이다. 율법에 나타나 있지 않은 것들은 공정한 재판의 판례들에서 찾을 수 있는데도 그것들은 전혀 시행이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다고 했다. 의인들은 극소수이고 대부분 악인들 뿐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공정한 재판을 내린 판례들이 왜곡되어 행해진다는 것이다. 똑바르게 세워져 있어야 할 정의가 비틀어지고 꼬인 모양으로 세워져 있는 것이다.
악인들이 누구일까? 어떤 이들은 바빌론 사람들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현대 성서 해석자들은 유다 사람들이라고 말한다(Peterson, 668-69; Robertson, 141). Barker도 역시 유다 사람들이라고 말하면서 여호야김의 통치 때의 유다 사람들일 것이라고 말한다(Barker, 298). 악인들은 유대사람들을 억압하던 이방 사람들이 아니라 유대의 악한 왕 여호야김과 그 백성들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한다고 외치던 의인들은 악인들에 둘러싸여 핍박을 받고 있고 악인들은 자신들이 행하는 악한 행위가 하나님의 정의라고 떠드는 상황이다.
예수님의 시대에도 하나님 말씀은 무시되고 하나님의 현명한 재판 기록들은 왜곡되어진 채 행해지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 사람들도 살인, 분노, 원한으로 인한 고소, 간음, 거짓맹세 등을 하면서 하나님 말씀을 왜곡시켜 자신들은 괜찮다고 했던 것이다. 예수께서 마태복음 5-7장에서 하나님 말씀의 참 뜻을 말씀하신 것도 이처럼 하나님의 정의가 비틀어지고 꼬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도 하나님 말씀에서 죄라고 말하는 것이 하박국 시대와 예수님 시대와 마찬가지로 무시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한 악인들은 예나 지금이나 교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에게는 적용하지 않고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일에만 쓰기 때문이다. 자신이 한 것은 말씀을 비틀어서 괜찮다고 하고 남에게는 잘못되었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이나 한국에 교회가 그렇게 많고 신자들이 많아도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고 교회 안에서 다툼과 분쟁이 넘치는 것이다. 의인은 비판하는 자가 아니라 말씀 앞에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함께 그렇게 하자고 선포하고 권면하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