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8:1-2 분이 풀리지 않은 사울은 주님의 제자들에 대해 위협하고 죽이려고 식식거리면서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마스커스 여러 회당에 갈 공문서를 달라 했는데 이는 모든 믿는 자들을 다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는 것이었다.
이전 말씀에서는 복음을 듣고 기쁨으로 가득찬 에디오피아 내시가 물을 발견하고 빌립에게 침례를 받은 뒤 제 갈 길로 갔고 빌립은 여러 도시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가이사랴까지 갔다는 내용이었다. 이어지는 말씀은 스데반을 죽이고도 분이 풀리지 않은 사울이 다마스커스 회당들까지 가서 그리스도 인들을 닥치는대로 잡아오려는 내용이다.
8:1절에서 사울은 스데반이 죽임 당한 것을 마땅하게 여겼다고 했다. 사울의 핍박으로 흩어진 믿는 자들 중에 빌립이 사마리아 사람들과 땅 끝에서 온 사람에게 복음 전하는 내용이 이어졌다. 이제 다시 사울이 등장한다.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히 여겼던 사울은 여전히 믿는 자들을 죽이려고 사나운 들짐승처럼 식식거리고 있다.
9:1절은 "그러나" 라는 말로 연결된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지중해 연안을 따라 올라가며 복음을 전하던 빌립과는 반대로 성령님을 대적하는 자가 나온다는 뜻이다. 빌립이 성령 충만하여 지중해 해안선을 따라 북으로 올라가며 복음을 전하는 모습과 분노에 충만한 사울이 북쪽으로 다마스커스까지 올라가는 모습이 대비가 된다. 사울은 믿는 성도들에 대한 최고의 원수요 성령님의 대적이었던 것이다. 사울은 주님의 제자들을 위협하면서 살기를 띠고 있었다고 했다.
위협한다는 말은 잠언 19:12절과 20:2절에서 "왕의 진노" 라는 말에서도 나왔다. 이사야 50:2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진노로 꾸짖으시니 바다가 말랐다고 할 때 나온 말이다. 사도행전 4:29절에서는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에서 위협한다는 말로 쓰였다.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면 죽이겠다고 위협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위협한다는 말은 말로 죽이겠다고 경고하는 것이다. 또 살기를 띠고 있다는 말은 실제로 죽이려는 태도를 보이는 것을 말한다.
NIV는 살기를 띤 위협으로 번역하여 죽이려는 한다는 말이 위협을 꾸미는 말로 번역했다. 일부는 NIV와 같이 살기를 띤 위협이라며 두 단어를 따로 해석하지 않는다. 그러나 원어는 다수의 영어 번역처럼 위협하는 것과 동시에 죽이려고 했던 것이다. 다수는 이 두 단어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 유대인들의 재판 절차로 해석한다. 유대인들은 재판할 때 말로 해서 듣는 사람들에게는 위협하여 석방을 했고 그래도 듣지 않을 때는 돌로 쳐 죽였다. 하나로 합쳐서 해석하는 것은 누가가 그러한 절차를 강조한 것을 삭제하는 것이다.
사울은 위협과 살기로 가득하여 여전히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던 것이다. 원어에는 숨을 몰아 쉰다는 말이 있다. 이는 사나운 맹수가 으르렁거리며 거친 숨을 몰아 쉬는 것을 말한다. 사울의 위협적인 말과 살기 가득한 거친 숨결이 믿는 자들에게 큰 두려움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미 예루살렘을 빠져나갔던 것이다. 그러자 사울은 분노하여 대제사장에게 간 것이다. 대제사장에게 간 사울은 2절에서 다마스쿠스에 있는 여러 회당에 보내는 편지를 써 달라고 부탁을 했다. 제자들 중 상당 수가 다마스쿠스로 갔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다마스쿠스는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135마일 떨어진 곳이었다. 그곳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기에 회당도 여러 개가 있던 곳이다.
문제는 다마스쿠스는 유대의 영토가 아닌 이방 지역이었기에 대제사장의 권한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었다. 따라서 유대교의 율법으로 사람들을 정죄할 수 없는 곳이다. 그런데 어떻게 대제사장이 다른 나라로 도망간 사람들을 잡아 달라는 편지를 보낼 수 있을까? 외경인 마카비1서 15:21절에 다음과 같이 답이 나와있다.
그 내용을 번역해 보면 "만일 그 나라에서 어떤 전염병 같은 자가 당신에게 로 달아나거든 대제사장 시몬에게 넘겨주어 그가 자기네 율법 대로 벌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다. 이는 로마 대사가 이집트의 왕 Ptolemy VIII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다. 이는 기원전 47년 시저가 이러한 대제사장의 특권을 확인해 준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제사장의 편지를 들고 가면 율법을 어기고 다마스쿠스로 도망한 유대인 기독교인들을 다 잡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로마제국 안에서는 일종의 범인 인도 협정과도 같은 것이 있었던 것이다. 사울은 전염병처럼 번지는 기독교인들을 잡아 모두 없애려고 했던 것이다. 사울이 이러한 편지를 받은 것은 그 도를 믿는 사람은 남자나 여자나 닥치는 대로 묶어서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려는 것이었다. 그 도를 믿는 사람들이란 예수를 믿는 제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울의 스승인 가말리엘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아니라면 그냥 놔 두면 저절로 사라진다고 했다. 그런데 그 제자인 사울은 전염병 균 같은 자들을 완전히 소독하여 다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스승과 제자의 차이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스데반과 빌립의 스승들인 사도들은 유대교의 범위 안에서 온건하게 복음을 전하려고 했다. 그러나 스데반과 빌립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전적으로 순종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을 유대교라는 옛 부대를 버리고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나섰다.
사울도 헬라파 유대인이고 스데반도 헬라파 유대인들이다. 헬라파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이방인들에게 거침없이 나갔다. 그들은 유대인들만 사는 곳에서 성장한 사람들이 아니라 이방인들 가운데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말리엘이나 사도들은 성전 중심의 히브리파이기 때문에 비교적 온건한 태도를 취했던 것이다. 히브리파들은 성전 중심이었기에 이방인들에게 나가는 것을 꺼리며 조심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울과 스데반이나 빌립 같은 헬라파들은 말씀 중심이었기에 말씀에만 순종해야 한다며 서로 극단적으로 충돌한 것이다. 이들은 서로가 자신들이 지키는 가르침에 열성이 대단했기 때문에 충돌한 것이다. 분노가 충만한 사울과 성령이 충만한 그리스도인들이 정면충돌한 것이다.
어느 쪽이 맞다고 할 수 없다. 오늘날도 히브리파 유대인들처럼 적들과 함께 어울려 지내면서 온건하게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도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또 적극적으로 온 세상에 나가 공격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도 필요하다. 만약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사도들도 모두 다 스데반이나 빌립 같았더라면 기독교는 그 근거지를 잃었을 것이다. 온건한 기독교인들이 있었기에 그들은 바울과 같이 공격적인 선교를 하던 사람들의 본부가 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