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0:22-26 유대교 지도자들은 적대감을 가지고 예수님을 포위하고는 그리스도인지 분명히 말하라고 하자 예수께서는 이미 말했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증거를 보였다며 너희는 내양이 아니라고 하셨다.
이전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유대교 지도자들 중 대다수는 예수가 귀신들렸고 미쳤다며 귀를 막았지만 그중 소수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인정하는 내용이었다. 이어지는 말씀은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향해 그리스도인지 분명히 말해달라고 하자 예수께서는 너희는 내 양이 아니라고 하시는 내용이다.
22절은 예루살렘에서 성전 봉헌절 축제가 열리고 있었는데 그 때가 겨울이었다고 말한다. 성전 봉헌절이란 구약성경에는 없는 절기이다. 구약과 신약의 중간시대에 일어난 일을 기념하는 절기이기 때문이다. 성전 봉헌절이란 말은 원어에서 다시 새롭게 했다는 뜻이다. 건물을 다시 새롭게 한 것을 축하하는 축제라는 뜻이다. Seleucid Empire의 Antiochus Epiphanes가 예루살렘 성전에 그리스 신들을 섬기는 제단을 세워 성전을 더럽혔던 것을 167 BC에 정결하게 해서 하나님께 바친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Antiochus Epiphanes는 자신을 스스로 신이라 해서 신성모독의 죄를 범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면 유대교 지도자들은 성전 봉헌절에 예수님도 자신을 스스로 하나님이라 해서 신성모독을 범하고 있다고 죽이려 하고 있다. 저들은 예수님을 새로운 Antiochus Epiphanes로 보고 있는 것이다.
23절에 보면 “예수께서는 성전 경내에 있는 솔로몬의 주랑을 거닐고 계셨다” 라고 했다. 솔로몬의 주랑을 거닐고 계셨다는 말과 겨울이라는 말은 잘 맞는다. 겨울에 이스라엘은 동쪽에서 찬 바람이 불어오는데 솔로몬의 주랑은 그 바람을 막아주는 장소였다. 24절에 보면 “그 때 유대 사람들이 예수를 둘러싸고 말하였다” 라고 했다. 유대 사람이란 유대교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예수님을 잡으려고 살기등등한 태도로 예수님을 포위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한 말은 새번역을 보면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의 마음을 졸이게 하시렵니까? 당신이 그리스도이면 그렇다고 분명하게 말하여 주십시오” 라고 번역되어있다. 개역은 “의혹케 하려 하나이까?” 라고 번역했다. 원어에서 이 말은 목숨을 집어 든다는 뜻이다. 뜻이 통하지 않기에 개역과 새번역 모두 의역을 한 것이다. 영어 번역들도 역시 “in suspense” 로 의역을 했다. 원어를 항상 문자적으로 번역하는 YLT 조차도 “in suspense” 라고 번역했다. 그러나 이는 원어를 직역하지 않으면 원어에서 대조하고 있는 그림을 놓치게 된다.
당신이 그리스도이면 그렇다고 분명히 말해달라는 말은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기에 분명하게 말해달라는 적대감이 담기지 않은 단순한 질문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여러가지 비유로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계속해서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요한복음의 문맥을 보면 궁금해서 묻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죄로 확실하게 죽일 수 있도록 분명히 그리스도라 말해달라는 뜻이다. 대부분 적대감을 가지고 죽이려는 의도로 질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예수께서는 10:11절에서 양들을 위하여 스스로 자기 목숨을 내려 놓는다 하셨다. 그런데 유대교 지도자들은 그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자기들 목숨을 집어 든다고 말한 것이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인지 아닌지 궁금하다는 뜻이 아니다. 언제까지 자신들의 목숨을 들고 있으면서 자신들의 밥줄을 끊으려 할 것인지 밝히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지 분명히 말하라는 것은 그러면 믿겠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들이 예수님의 목숨을 집어 들겠다는 뜻이다. 분명히 말하면 확실하게 죽여주겠다고 협박하는 모습이다.
그래서 그러한 의도를 알고 25절에서 예수님은 이들에게 대답하시길 “내가 너희에게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가 믿지 않는다” 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그 일들이 곧 나를 증언해 준다” 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그 증거들을 보여주셨는데도 유대교 지도자들은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믿지 않는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하심이 자신들의 기대와는 달랐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살과 피가 빵과 포도주라고 하셨다. 자신은 양들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내려놓겠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고난 받는 종으로 드러내셨다. 그러나 유대교 지도자들을 비롯한 모든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지도자를 기대하고 있었다. 다윗과 같은 강력한 왕이 나타나서 로마 군대를 몰아내고 주변의 모든 나라를 정복해서 강력한 제국을 이루어 줄 것으로 기대했다. 구약의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욕심을 따라 해석해왔기에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 것이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구약성경을 철저히 연구하고 믿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저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뜻에 따라 구약성경을 읽고 연구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다른 민족의 노예로 살았던 저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구원해 주실 것으로 생각하고 성경을 읽었다. 저들은 자신들을 구원할 정치적 군사적 지도자가 필요했기에 그 생각을 마음에 품고 성경에서 그러한 그리스도를 찾아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메시야가 오신다고 후손들에게 계속 그 잘못된 가르침을 전달한 것이다.
이처럼 성경을 자신들의 뜻에 맞추어 읽고 가르치던 유대교 지도자에게 예수님께서는 충격적인 말씀 하셨다. 26절에서 예수께서는 “그런데 너희가 믿지 않는 것은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라고 하셨다. 10:3절에서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하셨다. 개나 고양이들도 주인의 목소리를 알아 듣는다. 그런데 주인 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못 알아 듣고 죽이려고 포위하고 있으니 저들은 예수님의 양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자신이 갖고 있는 생각과 욕심에 맞추어 성경을 해석할 수 밖에 없다. 설교자들도 시대적 사회적 상황을 보고 그에 맞추어 성경에서 필요한 구절을 찾아 설교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서 역사의식이 있는 설교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렇게 시대와 상황에 따라 해석하고 전한다면 하나님 말씀은 반드시 왜곡되어 전달될 수밖에 없다.
성경을 읽고 연구할 때는 자신의 생각과 뜻은 완전히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겸손히 들어야 한다. 자신이 이미 듣고 읽어서 알고 있는 성경을 다 내려놓고 한글자 한글자 문법과 문맥과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따라 다시 읽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날 우리도 예수님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처럼 자신들의 관심에 초점을 맞추고 성경을 읽게 된다. 그러면 그렇게 해석한 한다면 그러한 사람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양이 아니다.